'욱, 하는 당신, 혹시 자기연민?' / '윤홍균'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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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자기연민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겨 무력하고 절망적인 감정 상태를 말한다. 양말 때문에 아내와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퇴근 후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양말을 벗어놓으면, 아내는 "홍균 씨, 양말 좀 세탁통에 넣어요" 라고 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야지!" "내가 병원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닌 걸 왜 이리 몰라줘?"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자존감에 대해 강의를 다니다 보니 "나는 자기애가 강해서 자꾸 트러블이 생겨요"라고 말하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을 볼 때면 양말 하나에 감정이 상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사소한 행동에도 상처를 받고 발끈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부서마다 한 명씩은 꼭 있다. 자신을 최우선시하고, 자기 기분 상하는걸 못 견디는 사람, 남에게 소홀한 대접을 당할까봐....
지나치게 의식하고, 필요 이상으로 감정에 예민한 사람들 말이다. '저게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낳지만, 자신은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자존감이 높다고 믿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경우는 자기를 연민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을 존중하지도,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불쌍한 사람'
'뭔가 결핍되고 상처받았기에 돌봐줘야 하는 사람' 으로 여긴다. 자신을 위해 고가의 선물도 하고, 치장에 열중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련한 나의 인생에 위로를 건네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연민은 사랑과 다른 감정이다. 사랑은 존경과 믿음을 수반하지만 연민은 가엾음과 불신을 동반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를 믿고 독립적으로 키우는 반면 연민하는 부모는 과잉보호를 한다.
"너는 약하고, 표현력도 부족하니 내가 돌봐주고 도와줘야 해" 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는 자녀를 위한답시고 결정도 대신해주고 의사소통도 대신해준다. 부모도 힘들지만 자녀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며 서럽다.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는 점점 무기력해진다. 현대인들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학생 때부터 시작된 성적 경쟁이 험난한 취업 전쟁으로 이어지고....
격무로 시달리는 직장생활에서 적절한 보상을 받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치이고, 비효율적인 야근이 이어지고, 주말이나 퇴근 후에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다 보면 '불쌍한 내 인생아. 넌 언제쯤 나아지니' 하는 생각에 울컥한다. 열심히 살지만 나아진 것 없는 자신의 모습에 수시로 측은지심을 느낀다. 자기연민은 자기합리화 행동으로 이어져 문제를 일으킨다.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
나에게 선물을 줘야 해" 라며 밤늦도록 폭탄주에 취하거나 과식, 과소비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고생한 나를 위로하는 거라고 합리화를 해보지만, 이런 행동은 건강과 통장 잔액을 공격할 뿐이다. 위로가 아닌 자학으로 이어져 자존감에 2차 피해를 받는다. 자기 연민이 강한 자아는 건강할 수 없다. 과잉보호를 받은 자녀처럼 무력감이 커지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남의 감정이나 불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화 안 나게 생겼냐?" 며 고함을 질러대거나, 밤 늦도록 술자리에 앉아 신세 한탄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 뒤에는 자기 연민이 숨어 있다. 공감능력도 떨어져서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너만 힘들어? 나는 더 힘들어"라며 소통을 이어 나가지 못한다. 작은 일에 서러워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꾸 트러블이 생긴다면, 내가 지금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겪은 일을 "단지 ~일 뿐이야"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단지 업무로 지적당했을 뿐이야" "단지 직장일 뿐이야"라며 감정이 확대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나 또한 "이건 단지 양말을 세탁통에 넣으라는 뜻이야"라고 생각하자 아내와의 갈등이 풀리기 시작했다. 몸이 지쳤을 때 생각을 너무 많이, 깊게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글 보낸이 : 이종구 )